한 로일군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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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합회선전국 권헌
렴순자선생은료녕지구협회심양시지부의로일군이다. 크지 않은 체구에 단정한 옷차림 백발을 날리는 씩씩한 걸음새는 91세의 고령로인이라고 믿기 어렵다.
오래동안 유치원교원사업에 종사하여 모두들 렴선생이라고 부른다. 건강장수의 비결을 물으면 아침마다 운동하고 과식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렴순자선생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시이다. 엄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전쟁이 끝나고 사회에서 일하다가 서영화선생을 만나 부모형제와 정든 고향을 리별하고 말도 글도 모르는 낯설은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서영화선생은 조선청년들로 구성된 중국인민해방군166사에 참군하여 동북에서 싸우다가 조국해방전쟁전에 조선에 나가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여 작곡을 하면서 조선인민군의 군악대장, 협주단예술부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56년 11월,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제대되여 중국으로 귀국할때 렴순자선생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와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서 사업하면서 많은 노래들을 작곡하였다.
렴순자선생은 남편따라 중국에 와서 가정을 꾸리면서 심양시의 공민학습조할동에 적극 참가하여 조장으로 일하면서 작곡가인 남편의 사업을 도우면서 심양시조선족유치원에서 교원사업을 하였다.
1950년대 말부터 시작한 심양시조선공민학습조활동에서 남편따라 중국에 온 조국녀성들이 핵심이 되였다. 심양시조선공민학습조활동은 문화대혁명을 경과하면서 시련을 겪었다. 조선령사관의 적극적인 방조와 지지로, 조국에서 온 녀성들의 견결한 투쟁에 의하여 마침내 심양시조선공민할동이 정상궤도에 들어섰다.
당시는 학습도 자주하고 주요계기에는 활동도 많이 하였는데 교통과 통신이 불비하여 렴순자선생을 비롯한 공민책임자들이 수고를 많이 하였다.
재중조선인총련합회가 성립된후 심양시지부는 본부를 받들어 애국할동과 공민활동에서 앞장에서 일을 잘하여 3중모범지부의 영예를 가지였다.
이영예에는 오래동안 서탑소조조장으로 일하며 수고한 렴순자선생을 비롯한 로일군들의 공헌이 크다.
내가 십여년전에 심양시지부장으로 일할때 렴순자선생이 나에게 많은 방조와 지지를 주었다.
심양시지부의 오랜 애국활동력사도 들려주면서 때로는 주저하는 나를 고무격려하여 주었다.
나는 이것을 언제나 잊지 않는다.
한번은 우연히 서영화선생의 작곡집<세월과 더불어 부른 희망의 노래>책을 보았다.
근 천여수의 작품을 창작수집한 서영화선생의 작품에서 선택하여 출판한 종합적작곡집이다. 책에는 렴순자선생이 50년대말에 작사한 ≪사회주의농촌행진곡≫. ≪새봄≫. ≪안해의 심정≫등도 있었다.
잘 믿어지지않아 렴순자선생에게 알아보니 서영화선생의 작사작곡이라고 발표한 노래의 가사는 대부분 렴순자선생이 작사 혹은 도와준것이라고하면서 젊은 시절에는 책도 많이 보았다고한다.
렴순자선생의 지식과 겸손에 나는 존경을 보내면서 깊이 자책되였다.
렴순자선생은 공민활동뿐만아니라 조국지원에도 언제나 앞장섰다.
본부에서재정곤난으로힘들어할때자신의사회보장금에서일부를떼내여본부비용에쓰라고지금까지10여년을 꼭꼭 보내주고있다.
사람이 좋은 일을 한두번하는것은 쉽지만 십여년을 자신의 사회보장금을 떼내여 본부를 돕는다는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본부를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없이는 이렇게 할수가 없다.
무순시지부의 전지부장김옥순공민도오래전부터 자신의 사회보장금으로 본부에 비용을 보내주고있다. 바치는것이 기쁨인 고상한 품성이 이끄는 이 아름다운 소행을 정말이지 글로 표현하기 힘들다. 정말 큰소리로 이 분들의 고상한 소행을 자랑하고 싶다.
언제나 밝은 미소를 지으며 례절이 밝은 렴순자선생은 본부에 들릴때면 빈손으로 오지 않고 과일이나 떡, 커피를 들고 온다.
우리가 년세가 많아 활동에 부르지않을가봐 계기때에는 문의도 하군 한다.
현재 우리 재중조선인총련합회산하지부에 지원군남편을 따라 중국에 들어온 녀성공민들이 몇분계시지않는데 건강한 분은 더구나적다.
나는 렴순자선생과 함께 조국방문도하고 길림행사에도 여러번 참가하였다.
내가 감동된것은 렴순자선생은 조국을 사랑하고 조직을 사랑하고 동지들을 관심하는것이다.
반년전에로 일군방문단으로 렴순자선생과 함께 조국을 방문하였는데 년세가 제일 많은분이 앞장에서 걸으면서 조국에 기금도 솔선적으로 발기하면서 주방도 후원하며 방문단성원들을 돌보주었다.
달리는 렬차에서 들려준 청춘시절과 고향이야기로 가슴부푼 렴순자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년세가 있어도 나에게 항상 존대어를 썼다.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의 마음이 불타고 있는. 두고온 고향을 지금도 못잊어 애달파하는 렴순자선생은 정말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본보기이다. 며칠전에 나에게 한번더 함께 조국을 방문하자고 간청하였다. 나는 기꺼이 동의하였다.나에게는 이것 밖에 렴순자선생에게 보답할것이 없기 때문이다.
조국을 사랑하고 본부를 사랑하는 렴순자선생이 아름다운 삶이 행복하여 장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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