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선간호원과 《그네뛰는 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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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승 70돐을 맞으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기관지 《로동신문》 6월 28일부에는 6명의 전시가요창작가들에 대한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다. 그 한가운데는 곱게 생긴 녀류시인의 얼굴도 보였다.
2022년 12월 《내나라》 싸이트에 소개된 기사 《화선간호원과 전시가요 <샘물터에서>》의 주인공인 최로사(1932년-2011년)⋯
부상자들을 그렇듯 열렬히 사랑했고 부상을 입은 그들의 모습에서조차 승리의 날을 확신했던 아릿다운 처녀간호원의 인생은 어떠했을가?
⋯전선간호원에게도 사랑은 찾아왔다.
어느날 그가 군무하는 야전병원으로는 전쟁전 김일성종합대학 합창단의 지휘자로 소문났던 어문학부학생 김준도가 실려들어왔다. 그를 최로사가 담당하게 되였다. 처녀의 살뜰한 손길에 의해 완쾌된 그는 또다시 전선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후인 1951년 8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일성동지(1912. 4. 15-1994. 7. 8.)께서는 대학생들을 전선에서 소환하여 학업을 계속하도록 해주시였다.
야전병원 간호원 최로사와 중상당하여 그의 손에서 완쾌된 모범전투원 김준도는 모교에서 뜻깊은 상봉을 하게 되였다. 총대대신 펜을 쥔 그들은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러던중 어느날 로어과 2학년생 최로사는 급병으로 사경에 처하게 되였다. 그때 김준도는 그를 업고 험한 고개가 몇개나 가로놓인 병원으로 달려가 위기에서 구원하였다.
서로를 위하는 전우애로 하여 두사람은 잊을수도 끊을수도 없는 사이가 되였으며 마침내 한쌍의 부부가 되였다. 김준도는 서도민요창의 고향이라고 할만한 강서땅에서 자라서였는지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가지고있었고 소년시절에 벌써 학생예술공연에서 입선한 전적도 있었다. 대학시절의 합창지휘자는 작곡가 황학근의 도움을 받으면서 전공분야인 어문학보다 음악에 더 큰 애착을 느끼고있었다. 그리하여 어문학부졸업생 김준도는 당시 국립민족예술극장의 작곡가로, 로어과졸업생 최로사는 국립예술극장 현직작가이면서 소개자로 둘다 자기 전공이 아닌 곳에 배치를 받게 되였다.
시대에 대한 열렬한 긍정과 사랑으로 고동치는 두 심장은 재더미를 털고 일떠서는 조국의 벅찬 현실을 노래하고싶은 하나의 열망으로 끓어번졌다. 그러나 몇해전까지만 해도 화약내 슴배인 군복을 입고 총포성을 들어오던 그들이 환희롭고 민족적정서에도 맞는 작품의 생활적종자를 찾는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기적은 최로사에게서 먼저 일어났다. 1956년 어느 봄날 그는 극장동무들과 함께 모내기를 도우려 평양시교외의 농촌에 나간적이 있었다. 허리가 시큰하도록 또 한배미의 논에 모를 다 꽂으니 어느덧 즐거운 쉴참이 되였다. 때는 봄바람이 솔솔 부는 쾌청한 날씨였다. 보람찬 로동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피로를 잊게 하였다. 한쪽에서는 커다란 느티나무에 맨 그네를 타는 처녀들로 웃음꽃이 피였고 시내건너 하얀 모래터에는 구리빛어깨를 드러낸 름름한 총각들이 씨름겨루기에 여념이 없었다. 랑만으로 가득찬 이채로운 농촌풍경이였다. 문득 시인의 머리에는 전화의 그날 우물가에서 만났던 인민군병사들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바로 오늘의 이 기쁨을 위해 5년전 그날 저 처녀들이 전선으로 떠나는 군인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우물가의 진달래꽃을 꺾어주며 승리의 날 또 오라고 하지 않았을가? 바로 이 기쁨을 찾기 위해 웃으며 전선으로 떠나갔던 그 젊은이들이 이렇게 눈앞에 돌아온것이 아닐가?!》
최로사는 수첩과 연필을 꺼내들었다. 능수버들 늘어진 뒤동산 그네터, 5월이라 실바람이 훈훈하게 불어오는 화창한 봄날, 쌍그네로 창공높이 날며 모내기를 끝낸 논판을 바라보는 처녀들의 기쁨, 머리마다 꽃송이로 장식하고 바람타고 춤을 추는듯한 그들의 모습, 구름밖을 날으며 저 멀리 평양을 보려는가, 꾀꼴새도 그들을 기쁘게 하려 날아예는가, 바로 이날을 위해 저 처녀들이 전쟁의 불구름을 웃음으로 날려보냈고 저 총각들이 진달래꽃향기를 안고 전선으로 떠났을것이다.
저녁에 최로사는 이런 시적감정을 담은 가사를 남편 김준도에게 보였다. 작곡가는 너무 좋아 장단맞춰 어깨를 들썩이며 곡을 붙여나갔다. 그런데 다된 곡을 들은 안해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어떤 대목들이 시적운률의 요구대로 흥취를 돋구지 못하는것이였다. 부부는 한밤이 지새도록 지혜를 모아 다듬고다듬어 새벽녘에야 완성품을 마주할수 있었다.
참말로 시적이고 회화적인 표현들이 조선민족음악장단의 하나인 양산도장단에 건드러지게 태워진 민요풍의 노래가 나왔다. 특히 《능수버들 휘늘어진》, 《훈훈하게 불어오네》, 《에헤야 즐거워라》, 《구름밖을 날아보자》 등의 인상적인 시어들은 부르면 부를수록 그대로 바람타고 춤을 추는듯하였다.
당시 《그네뛰는 처녀》는 신민요가수였던 선우일선이 처음으로 불렀고 방송으로 록음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작품이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1942. 2. 16-2011. 12. 17.)의 세심한 가르치심속에 시대의 명곡으로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네뛰는 처녀》 와 같은 명곡들의 편곡형상방향도 가르쳐주시면서 이 가요는 명절을 즐기는 농장원처녀들의 랑만적인 생활감정과 행복하고 보람찬 생활을 노래한것으로서 우리 인민들이 매우 좋아하는 노래들중의 하나이라고, 이 노래를 관현악으로 잘 만들면 인민들이 더욱 좋아할것이라는 교시를 주시였다.
이렇게 창작된 관현악 《그네뛰는 처녀》는 우리 인민들을 더욱 기쁘게 하여주었으며 1988년 5월 이전 쏘련의 레닌그라드에서 열린 제3차 국제음악축전에서 조선식관현악의 경지를 보여준것으로 하여 참가자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였다.
노래가 나온지 반세기가 훨씬 넘었지만 오늘도 이 노래는 국립교향악단의 무대에서뿐 아니라 로동의 희열이 약동하는 거리와 마을, 건설장과 휴식터들에서 민족적향기를 풍기며 울리고있다.
한쌍의 부러운 창작가부부, 김일성상계관인인 시인 최로사도, 그의 남편이며 재능있는 음악가인 김준도도 지금 우리곁에 없다. 그러나 《샘물터에서》와 《그네뛰는 처녀》 는 그들의 이름과 함께 끝없는 선률로 울려퍼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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