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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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우리 나라 천년강국이였던 고구려를 계승하고 단일민족으로서 하나의 강토에서 살려는 겨레의 숙망을 완성한 첫 통일국가이다.
918년 왕건에 의하여 후삼국들중의 하나였던 태봉국을 전복하고 세워진 고려는 1392년까지 474년간 존재하였으며 발전된 문화수준으로 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고려의 력사는 1170년 무신정변을 분기점으로 하여 크게 두 단계 즉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한다.
건국초기 왕건은 나라이름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고려》라고 부르고 《천수》라는 자체의 고유한 년호를 제정하였으며 수도를 철원으로부터 오늘의 개성으로 옮기고 그곳을 개경이라고 불렀다.
고려는 고구려의 지향을 계승하여 나라와 겨레를 하나로 통일하기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려나갔다.
고려는 후삼국의 각축전속에서 생겨난 각지의 지방봉건할거세력들을 포섭하는 신축성있는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신라를 끌어들이고 후백제에 대한 강경정책을 실시하였다. 맏아들 신검의 정변으로 왕자리에서 물러난 후백제왕 견훤에 대한 우대정책은 신라의 귀순을 다그치게 하였으며 마침내 935년 11월 신라는 고려에 투항하였다. 이러한 성과에 토대하여 고려는 936년 6월 일리천(경상북도 선산군)전투에서 후백제군을 최종적으로 격멸하고 후삼국의 통합을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926년 동족의 나라인 발해가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고구려의 옛땅인 서북지방을 차지하여 자기의 령토를 넓혀나갔다.
이리하여 고려는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처음으로 나라와 겨레의 통일을 실현하고 민족의 통일적발전의 길을 열어놓았다.
국토통일을 이룩한 고려는 봉건통치체제를 정비강화하는데 큰 힘을 넣어 10세기말-11세기초에 봉건적통치제도를 기본적으로 완비하였다.
고려는 이 시기 강력한 국력과 인민들의 애국투쟁에 의하여 세차례에 걸친 외래침략자들의 침입을 성과적으로 물리치고 조국의 강토와 민족의 존엄을 굳건히 지켜냈다. 그후 고려의 대외적위신은 훨씬 높아지고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전쟁승리후 고려는 1033년부터 12년동안 압록강어구로부터 함경남도 정평까지를 련결하는 천여리의 긴 성(고려장성)을 쌓았다. 또한 외적의 침입을 격멸소탕하고 1107년-1108년에 동북지방에 9개의 성을 쌓음으로써 고구려의 옛땅을 수복하기 위한 투쟁에서 큰 성과를 이룩하였다.
한편 12세기에 이르러 대토지소유자들의 세력이 자라나고 통치층안에서 권력싸움이 격화되여 봉건적통치질서에 혼란이 조성되였다.
고려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무신정권이 출현하고 외적의 침입이 계속되는 속에 봉건적억압과 착취가 강화되면서 이를 반대하는 반침략, 반봉건투쟁이 줄기차게 벌어졌다.
고려인민들은 13세기중엽부터 수십년동안에 걸쳐 외적의 침입을 반대하는 간고한 투쟁을 전개하여 승리를 쟁취하였다. 또한 14세기중엽이후 집요하게 계속된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고 북쪽으로부터 침입한 외적을 반대하는 완강한 투쟁을 벌려 나라의 자주권을 굳건히 지켜냈다.
고려시기에는 문화발전에서도 특기할 자랑찬 성과들이 이룩되였다.
우선 출판인쇄기술이 발전하여 《팔만대장경》과 같은 방대한 량의 불교경전출판사업이 진행되였으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가 사용되였다. 고려의 인쇄기술자들은 이전시기에 창조된 목판 및 목활자인쇄기술의 성과에 토대하여 12세기전반기에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은 금속활자사용에서 앞섰다고 하는 유럽보다도 300년이나 앞선것으로 된다.
또한 세계중세도자공예사상 특출한 자리를 차지하는 고려자기를 내놓았다. 특히 고려청자기는 도자공예의 극치를 이룬 문화적재보로서 세상사람들의 경탄의 대상으로 되였다.
이밖에도 천문기상관측기술, 건축, 조각, 금속공예, 문학과 예술, 미술 등 문화의 모든 부문이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새로운 화약제조방법에 기초한 화약무기제조기술이 발명, 도입되여 1380년 왜구를 격멸소탕한 진포해전에서 그 위력을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싸움배에 화포를 장비하여 실전에 도입한것은 세계적으로 볼 때 고려가 처음이였다.
이러한 높은 문화발전수준에 토대하여 고려시기 대내외상업이 활발히 진행되였다. 그가운데서 례성강어구에 있던 항구인 벽란도를 통하여 송나라와 동남아시아나라들, 지어는 멀리 대식국(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들과의 대외무역이 적극 진행되였다. 또한 벽란도부터 개경까지 30여리구간에 큰 상업거리가 형성되여 가게(상점)들과 민가들이 처마를 맞대고 즐비하게 련결되여있어 비오는 날 그 처마밑을 따라가면 비를 맞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11세기에 이곳을 통한 무역활동이 성행하였는데 고려의 화가 리녕이 그린 《례성강도》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있다.
이 과정에 고려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으며 외국어로 고려를 의미하는 꼬레야(로어), 코리어(영어), 꼬레(프랑스어), 코레아(도이췰란드어), 꼬레아(에스빠냐어)로 불리우면서 자주성이 강하고 용감하며 재능있고 문명한 조선, 조선민족을 가리키는 국제적용어로 보급되였다.
조선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실장 교수 박사 주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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